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벨 1세 (문단 편집) === 가족에 대한 일화 === 파벨 1세의 사후 [[나폴레옹 보나파르트]]가 넷째 딸 [[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 여대공|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]]를 후처로 삼고 싶어했지만 [[조피 도로테아(뷔르템베르크)|마리야 황태후]]는 [[유럽]]의 폭도떼 두목(?)인 나폴레옹이 사위가 될 상황을 펄펄 뛰며 반대했고, 러시아 관습상으로도 이 문제에서는 모후를 이길 수 없었던 알렉산드르 1세가 얼른 이종사촌인 올덴부르크 대공의 아들[* 훗날 [[올덴부르크]]의 대공 게오르크.]에게 예카테리나를 시집보내 버렸다.[*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는 이후 올덴부르크의 대공비가 되어 두 아들을 낳고 잘 살다가 남편과 사별한 뒤, [[뷔르템베르크]]의 빌헬름 1세와 재혼하여 왕비가 되었으나 딸을 낳은 뒤 얼마 되지않아 사망했다.] 당연히 나폴레옹에게 거절 편지를 보내야 했는데 당시 [[높으신 분들]] 예법은 직접적인 거절이나 비난을 하지 않기 때문에, 나이 40줄에 후계자가 급한 나폴레옹에게 전한 말이 "넷째 여동생 대신 14살인 막내 여동생 [[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|안나 파블로브나]]가 있는데 성인으로 장성할 때까지 기다려달라" 였다. 그나마도 이 편지가 도착한 것도 나폴레옹이 [[오스트리아]]를 쳐바르고 빈에서 [[프란츠 2세]]의 딸 [[마리 루이즈|마리아 루도비카]] 공주에게 청혼하고 나서였다. 당연히 나폴레옹 이를 꽤 불편하게 받아들였고 호사가들에겐 if 떡밥으로 "나폴레옹에게 순순히 여동생을 조공으로 바쳤으면 [[러시아 원정]]도 없었고, 나폴레옹의 몰락도 없고, 유럽의 역사가 바뀌었을 거다" 하는 [[카더라]]가 퍼지기도 했다. 6번째 딸 [[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|안나 파블로브나]]는 [[네덜란드]] [[빌럼 2세]]의 왕비가 되었는데, 서로 종교나 취향이 달랐지만 남편이 [[정교회]] 신앙을 존중해 준 덕분에 생활에 딱히 큰 문제는 없었다. 다만 자식들은 결혼계약에 의해 개신교 신자로 자랐다. 유럽에서 종교색이 옅어지는 19세기부터는 종교가 다른 국가나 가문끼리 결혼을 할 경우 한 쪽이 개종하거나 자식들을 특정 종교로 키운다는 합의[* 대부분 아내가 남편 쪽을 따르지만 드물게 상속녀와 결혼하는 [[데릴사위]]의 경우에는 아내의 종교를 따르기도 했다.]를 하기 때문에 종교의 차이가 그 이전 시기만큼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. 아이러니하게도 파벨 1세의 아버지 표트르 3세부터 러시아 마지막 황제 [[니콜라이 2세]]까지는 거의 모두 정교회를 믿지 않는 독일 제후국 군주 가문과 통혼했다.[* [[알렉산드르 1세]]의 황후 [[바덴의 루이제]], [[니콜라이 1세]]의 황후 [[프로이센의 샤를로테]], [[알렉산드르 2세]]의 황후 [[헤센의 마리]], [[니콜라이 2세]]의 황후 [[헤센의 알릭스]]. 예외는 [[덴마크의 다우마]]와 결혼한 [[알렉산드르 3세]]인데 덴마크 왕국도 러시아 정교회를 믿지않는다는 건 동일했다.] [각주] [[분류:1754년 출생]][[분류:1801년 사망]][[분류:전러시아의 황제]][[분류: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]][[분류:구호기사단장]][[분류: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가문]][[분류: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인물]][[분류: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 안장자]][[분류:암살된 인물]][[분류:질식사한 인물]][[분류:가터 훈장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